중국(中國) 주(周)나라 문무(文武)의 후예(後裔)로서 명(明)나라 신종(神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계요안찰사를 지냈다.
가씨(賈氏)는 소주(蘇州)를 단본으로 하며, 시조 가유약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서기 1593년(선조 26)
에 신종(神宗)의 명으로 원병을 이끌고 이여송(李如松), 마 귀(麻 貴) 등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와 안주(安州) 등지에서 왜군과의
싸움에 공(功)을 세우고 돌아갔다.
그후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유격장군(遊擊將軍)인 아들 상(祥)과 병부 종사관(兵部從事官)인 손자(孫子)
침(琛)을 데리고 다시 조선(朝鮮)에 들어와, 소사(素沙 : 지금의 부천), 남원(南原) 등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고, 부산(釜山)
포구(浦口)의 싸움에서 용전(勇戰)하던 중 아들 상(祥)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손자 침(琛)이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고 경남 울산 서생진 도독동(慶南蔚山西生鎭都督洞) 양지 바른곳에
무덤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서 명(明)나라 원병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도독(覩督) 마 귀(麻 貴)가 침(琛)에게 함께 귀국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조부(祖父)와 부친(父親)의 묘를 두고 어찌 이 곳을 떠나겠느냐하며 조선에 귀화하여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울산(蔚山)에
자리잡아 안동 부사(安東府使) 권 순(權 純)의 딸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었다.
1647년(인조 25) 침(琛)이 죽자 슬하의 아들 성(晟), 호(昊), 병(昺), 수(遂) 4형제는 충남(忠南) 서산(瑞山)으로 자리를 옮겨
우리나라 가씨(賈氏)의 터전을 이루었으며, 1851년(철종 2)에는 시조(始祖) 유약과 아들 상(祥), 손자 침(琛) <삼대(三代)의
충효(忠孝)>를 기리는 사당(祠堂)과 정문(旌門)이 서산(瑞山) 가씨(賈氏) 마을에 내려졌다. 그 후 가씨는 서산(瑞山)을 중심으로
한 충남 일대에서 충효(忠孝)의 전통을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이 크게 번성하였다.
중국(中國) 강소성(江蘇省) 남동부 태호(太湖) 동안(東岸)에 위치한 고장으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며,
일찍이 춘추전국 시대에 오(吳)나라의 국도(國都)로 발전하였고, 역대에 걸쳐 주변지역의 행정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소주가씨의 귀화조인 가침은 네아들을 두었는데 그가 죽은뒤 충남 서산으로 터를 옮겨 정착했다.
철종 때 3대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과 정문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가씨들은 이후 서산일대를 중심으로 충효의 가통을 이어왔다.
가행건(賈行健)은 시조의 14세손으로 천성이 어질어 도덕군자의 칭송이 높았으며 헌종 때 수군병마첨절제사를 지냈고 그의 아들
가일영(賈日永)은 철종 때 울진현령에 올랐다. 충량과에 장원급제 하고 고종 때 가선대부를 역임한 가중영(賈中永)도 가행건의
아들로 소주가씨의 가문을 빛냈다. 이외에도 프랑스 함대의 강화도 점령 때 의병을 일으킨 가익건(賈翊健)과 구한말의 청백리
가정로(賈廷魯)도 알려진 인물들이다.
조선 헌종 때의 명신 가행건(賈行健). 그는 충청도 안흥양진의 수군병마첨절제사가 되었는데 안흥지방은 전복과 해삼이 지방
특산으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다. 엄동설한에도 백성들은 차가운 바닷물에 드나들며 해삼, 전복을 따다 관가에 바쳐 서울로
올려야했다. 가행건은 이같은 민폐의 시정을 중앙에 강력히 건의해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이를 받아들여 진상공납을 폐지,
백성들의 고달픔을 덜게했다. 훗날 고을주민들은 돌과 구리로 각각 비석을 세워 그 공적을 새겼다고 한다. 그도 아버지만큼
선정을 펴 그가 울진을 떠날 때 군민들은 10여길이나 되는 암벽을 갈아 그의 공적을 새겼다.
소주(소성) 가(賈) 씨는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2,812 가구에 9,025 명으로 성씨내의 순위는 1위이며
가(賈)씨는 2,824 가구에 9,090 명으로 전체 성씨 순위는 113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충남 서산, 홍성, 당진, 예산 일대에 많이 거주한다. 그중에도 태안읍이 중심인데 전국 1천 8백
가구의 가씨 중 1천백여 가구가 서산군에, 6백여 가구가 태안읍에 산다.
입향조는 가침의 아들인 가성(賈晟)등 4형제. 그들은 가침이 세상을 뜬뒤 고국인 중국으로 돌아가고자 뱃길이 가까운 태안반도
안흥만에 도착했으나, 그때 중국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는 난세이므로 결국 귀환을 포기하였다.
소주(蘇州) 가(賈)씨는 중국에서 대성이나 우리나라에서는 희성이다.
선조25년(1592)에 귀화한 소주 가씨는 중국 소주를 본관으로 하는 단일 본이다. 전국에 6,000여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충남 태안 서산 예산 당진 등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가씨의 중시조 가유약(賈維약)은 중국 명나라때 병부상서겸 요동안찰사로
있던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선을 구하기위해 와 최일선에서 왜군과 싸웠다. 출정때의 나이는 55세였다.
가유약은 임란이 끝난뒤 당시의 전황을 면밀히 분석, 또 다시 전란이 재연할 소지가 많다는 것을 수차례에 걸쳐 명나라 황제에게
진언했다.
그의 예견대로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에 가유약은 아들 상(祥), 손자 침(琛)과 함께 3대가 출전, 남원 직산 담양
등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아들 상은 1만2,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린 유격장으로, 손자 침은 병부종사관으로 참전했다. 남원전투에서 의병장 박광옥(朴光鈺)·
박희인(朴羲仁)등 재장들은 군량미 보급에 전력했다. 위의 기록은 ‘호남지’‘동국실기’등에 실려있다.
그 뒤 부산 도독포(지금 자성대) 나자굴(螺子窟)에서 왜군과 접전, 대첩 7일만에 필승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적진에
뛰어들었던 아들 상이 왜군의 칼에 오른 팔이 잘렸다. 아들의 위급함을 직감한 아버지 가유약이 적진에 뛰어들었으나 중과부적
으로 부자가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이 어찌 천추의 한이 아니리오.” 손자 침은 비보를 접하고 달려가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울산 서생포에 안장하고 무덤 옆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지냈다. 그가 평생 일본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가침은 명나라로 환국하라는 권유를 받았으나 “할아버지와 아버지 묘소를 이곳에 두고 어디로 갈 수 있느냐”며 거절하고
한많은 일생을 이국땅에서 보냈다. 가침은 성, 호, 눌, 수 네아들을 두었다. 그가 정착한 곳은 망향의 문턱인 충남 태안반도.
이곳은 그의 후손들의 세거지로가 됐다.
3대에 걸친 공을 조선조정이 인정하여 철종2년(1851)에 왕명으로 3대를 기리는 ‘이충일효(二忠一孝)’의 ‘불천지사우(不遷之
祠宇)’를 하사했다. 그 뒤 1988년 8월30일 숭의사(崇義祠)라 이름하여 충남지방문화재 제300호로 지정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충과 효의 집안으로 명성이 높다.
가씨는 본래 주나라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의 후예다. 강왕(康王)이 당숙우(唐叔虞)의 유자(幼子) 공명(公明)을 가(賈)땅의
백(伯·長)으로 봉하면서 가씨로 성씨를 삼았다.
가유약의 자는 무경이고 호는 지백당이다.
1538년에 태어난 그는 황제의 명을 받아 조선의 지리를 조사해 환국하기도 했다. 그가 인진왜란과 정유재란때 참전한 것은 이와
무관치 않다.
임진왜란으로 의주에 피신했던 선조는 이덕형을 명나라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명나라 황제는 구원병력
5,000명으로 조선을 돕도록 했으나 명군은 평양성 싸움에서 왜군에게 대패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에 증군을 요청했으나
명 황제가 거절했다. 이에 가유약장군 등이 황제 설득에 나서 대규모 병력을 파병하게 됐다. 이 일화는 명심보감에 실려있다.
명 황제는 가유약장군에게 금 2만냥과 비단 5,000필을 주고 옥절보도를 하사했다. 또 선조를 알현하고 친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가유약은 이역에서 고생하는 장병들을 위로하고 싸움에서 공이 많은 자에게금은보화를 상으로 공평하게 나누어 주었다.
가유약장군은 선조를 알현한뒤 연안 차씨 오산 차천로(車天輅)와 함께 전략을 세우기도 했다. 그 뒤 평양까지 점령했던
왜군들이 후퇴하게 되고 한양을 되찾아 1593년 10월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