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 (古代) 오계시대(五季時代:오대의
문란해진 시대를 일컬음)에 후주(後周)의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서기 960년(고려 광종11) 장(張), 방(方), 위(韋), 변(邊),
윤(尹), 진(秦), 감(甘), 황보(皇甫) 등 8성(8姓)과 함께 고려에
들어와 귀화(歸化)하였다.
본관은 37본까지 기록 되어 있으나,
현존한느 관향은 신창(新昌) 단본이다.
표씨(表氏)는 중국에서 귀화(歸化)해 온 성씨(姓氏)로서, 현존(現存)하는 관향은 신창(新昌) 단본(單本)이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37본(本)까지 기록되어 있다. 시조 이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어, 후손들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합문지후(閤門祗侯), 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좌리공신(左理功臣)에 올라 온창 백(溫昌伯)에 봉해진 표인려(表仁呂)를
중시조(中始祖:일세조)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신창 (新昌)은 충청남도 아산군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땅인 굴직현을 통일신라 때 기량현으로 고쳐 온정군(온양)에
딸리게 하였고, 고려 초에 신창현으로 개칭하였고, 조선 태종때 온수현(온양)과
합하여 온창이라 하였다가 1914년 아산군에 들어가 신창면이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감찰을 지낸
계 (繼)의 아들 연말(沿沫)을 들 수 있는데, 성종때 문과중시에 급제,
장령(掌令), 시독관(侍讀官), 사간(司諫) 등을 지냈으며 당대의 명문장으로
이름이 높아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어 연산군때에는 응료(應敎)로 춘추관 편수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그후 직제학을 거쳐 승지, 대사간 등을 지냈다.
지중추부사를 지낸 헌(憲)과 그의 아들 정로(廷老)는 당대의 명역관(名譯官), 명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특히 정로(廷老)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때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게 되자 정로(廷老)는 원접사(遠接使)의 역관(譯官)이 되어 평안도 의주까지 마중을 나갔다.
명나라 사신은 연회석상에서 은행 알을 불에 구워 먹다가 문득 이쪽의 실력을 떠볼 생각으로 "은행껍질 속에는 푸른 구슬이 감추어져
있구나"라고 시한 구(句)을 읊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장로는 촌각을 두지 않고 "석류껍질 안에는 주사(朱砂:붉은 모래)가 점점히 박혀 있구나"라고 화답하니
명나라 사신은 역관(譯官)의 실력이 이렇듯 우수하니 원접사로 온 사람의 실력이야 어떠하겠느냐면서 그때부터 공손해졌다고 한다.
그외 인물로는 참봉을 지낸 근석(根碩), 인(仁), 명서(明瑞)와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의 녹권(錄卷)을 받은 광수(光守)가
신창표씨 가문을 더욱 더 빛냈다
1985년도 인구조사에서는 인구 2만
4562명으로 성별 순위는 274성 중에서 제76위였고, 가구수 5,883가구로,
전국 가구구성비 0.1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