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한 옛날 삼한 (三韓) 초(初) 한강(漢江)을
중심으로 여러 부족(部族)이 소국(少國)을 형성할 때 용문산 서록(龍門山西麓
: 현재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상곡)에 석성(石城)을 쌓고 웅거(雄據)한
촌장(村長)으로 세칭(世稱) 함왕주악(咸王周鍔)이라 불리웠다고 전한다. 함규(咸規)
: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 개국(高麗開國)에 공(功)을 세워 익찬개국공신(翊贊開國功臣)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 광평 시랑 (廣評侍郞)을 지내고, 몽고군(蒙古軍)이
침입했을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출전하여 적병(敵兵)을 물리쳐
평난좌명공신(平難佐命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그러나 그후의 기록은 없으므로 함규를 시조로 하고 있다.
본관은 양근 (楊根:경기 양평) · 강릉
(江陵) 외에도 문헌상에 64본이 전하고 있으나, 모두 세거지(世居地)를
뜻하는 것으로서 동원분파(同源分派)이다.
시조는 신라 때 동래(東來)한 혁(赫)이다. 시조 혁이 한국에 온 내력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일설에는 중국 주(周)나라 무왕 때 은(殷)나라의 유신(遺臣)으로 왔다고 하며, 다른 설에는 당(唐)나라 무종 때 대사마대장군으로 봉조동래(奉詔東來)하여
신라 문성왕으로부터 익화(益和:楊平) 자사(刺使)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그 무렵 조양(兆陽) · 복홀 (伏忽)의 두 현(縣)을 합하여 1군(郡)을 만들었으니, 그 이름이 곧 양근(楊根)이며, 지금도 양평에는 ‘
함공성 (咸公城) ' 또는 ‘ 함씨대왕성 (咸氏大王城) ' 이니 하는 함씨에 관한 전설이 많다 .
또, 양평 용문산 계곡에는 함씨혈(咸氏穴)이라는 바위굴이 있어 함씨 시조의 자취를 더듬어보게 한다.
시조 혁의 후손 중의 신(信)이 신라 원성왕 때 명주군왕(溟州郡王) 김주원(金周元:강릉김씨 시조)의 종사관이 되어 명주에서 살았는데, 19대
손 부림(傅霖)은 조선의 개국공신이었으며, 부림의 현손 헌(軒)이 명망이 높아 부림계의 함씨가 강릉으로 관적(貫籍)하였다.
강릉 (江陵)은 강원도(江原道) 영동(嶺東)지방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예국(濊國: 1세기초에 임둔의 옛 땅에서 자립한
부족국가)의 도성지(都城地)였으며, 상고시대에는 창해(滄海)와 임둔(臨屯)에
속했다가 313년(고구려 미천왕 14)에 개칭하여 하서량(河西良) 또는 하슬라(何瑟羅)라
하였다. 550년(진흥왕 11)에 신라(新羅)의 영토가 되어 선덕여왕(宣德女王)때
소경(小京)으로 삼았다가 태종무열왕조(太宗武烈王朝)에 하서주(河西州)로 개편,
경덕왕(景德王)때는 명주(暝州)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동원경(東原京)이라
칭하고 임영관(臨瀛館)을 세웠으며 940년(태조 23)에 다시 명주로 고쳤다.
성종(成宗)때는 처음에 하서부(河西府)로 하다가 986년(성종 5) 명주도독부(溟州都督府)로
개칭하고 뒤에 목(牧)으로 하였으며, 995년(성종 14) 지방행정구역을
10도(道)로 나눌 때 삭방도(朔方道)의 중심지가 되어 함경도를 비롯한 영동
일대와 영서(嶺西)의 춘천(春川) 이북 등지를 관할하였다. 1178년(명종
8)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로 개칭하고 원종조(元宗朝)에는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강릉도(江陵道)로, 충렬왕(忠烈王)때 강릉부(江陵府)로,
공민왕(恭愍王)때 강릉삭방도(江陵朔方道)로, 우왕(禑王)때 교주강릉도(交州江陵道)로
하다가 공양왕(恭讓王)때 대도호부(大道護府)로 승격시키고 별호를 임영(臨瀛)이라
하였다. 조선(朝鮮) 태조조(太祖朝)에 강원도로 개칭되어 세조(世組)때 진(鎭)을
설치하였고, 1667년(현종 7) 원양도(原襄道])로 고쳐 강릉현(江陵縣)으로
강등되었으며, 정조(正組)때 원춘도(原春道)라 하다가 강릉부가 되었다. 1896년(고종
33) 13도제(道制) 실시로 강원도 강릉군(江陵郡)이 되어 21개 면(面)을
관할하다가 1931년 강릉면이 읍(邑)으로 승격되고, 1955년 9월 1일
성덕면(城德面)과 경포면(鏡浦面)을 편입하여 강릉시(江陵市)가 되었다.
부림은 이성계를 도와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는데, 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뒤에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아우 부열(傅說)은
고려 말기 홍문관박사 등을 지냈으나, 조선시대에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그의 자손들은 본관을 ‘ 양근 ' 으로 하고 있다 . 부림의 아들
우치(禹治)는 세조 때 여러 도(道)의 관찰사를 지냈고, 성종 때 좌참찬에
이르렀다.
헌은 부호군(副護軍) 좌무(佐武)의 아들로 중종 때 명나라에 갔다가 오도자(吳道子)가 그린 공자유상(孔子遺像)을 가지고 왔는데, 한국에 공자
영상이 들어온 시초라고 한다.
한편, 부림 이전 ‘ 양근 ' 관향의 유일(有一)은 중시조 규(規)의 5대손으로, 고려 인종 때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하여 뒤에 병부상서에
이르렀으며, 아들 순(淳)은 문장과 덕행이 뛰어나 강좌칠현(江左七賢)으로 알려졌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선조를 의주로 호종하였고, 정묘호란 때 67세의 나이로 용전하다 전사한 응수(應秀), 순조 · 헌종 때에
예학과 시문으로 이름이 높았던 진태 (鎭泰) · 진숭 (鎭嵩) 형제, 국악의 명인으로 이름을 날린 제홍(濟弘) · 재영 (在 ) · 재운
(在韻) 3부자 등이 있다.
제홍은 대금과 단소의 명인으로, 맏아들 재영이 아버지의 업(業)을 계승하였고, 아우 재운은 고종 때 아악사장(雅樂師長)을 지냈는데, 근대
아악의 정통을 이어받은 악리학자(樂理學者)로서, 또 거문고의 대가로서 한국 국악의 전수 · 발전에 공을 세웠다 .
이 ‘ 국악의 명가 ' 의 가업 (家業)을 이어받은 사람이 8 · 15광복 후 초대 국악원장을 지낸 화진(和鎭:在韻의 아들)이다.
특히 근대에 들어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한말의 항일운동에 앞장섰던 일형(一亨)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인 목사 석규(錫奎)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일군에게 총살당하였다.
제3대 부통령을 지낸 태영(台永)은 한성재판소 검사로서 ‘ 독립협회 사건 ' 때 이상재(李商在) · 윤치호 (尹致昊) · 신흥우 등의 무죄를
주장 석방했는가 하면 , 그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과 종교운동에 헌신,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60년도 국세조사에 따르면, 인구
4만 1047명으로 성별 순위는 258성 중 제58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만 5685가구, 인구수 6만 5186명으로 274성 중 제59위였다.
강원도 고성군 간성면 교동리
강원도 명주군 주문진읍 장덕리
강원도 삼척군 하장면 용연리
강원도 김화군 근북면 금곡리
강원도 이천군 반교면, 풍림면 일원
평남 안주군 안주읍 용연리
황해도 연백군 해월면 해월리
평남 안주군 입석면 용정리, 내동리
함 함씨대종회 02-2294-7887 서울
-성동-마장-506-14
강릉(咸)s a 404-881-7813 a bham@alst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