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효공왕 (孝恭王 : 제52대 왕,
재위기간 :897 ∼ 912)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내다가 국운(國運)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利川)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은거(隱居)하면서 스스 로 처사(處士)라 칭하고 후진훈도(後進訓導)에
여생을 바쳤다. 「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신라 창업의 원훈(元勳)으로, 아성대장군(阿城大將軍)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천품(天 )이 인자중후(仁慈重厚)하여 화살을
맞고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 밤 꿈 속에 신인(神人)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당신 이 구해 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 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恩德)
으로 목숨을 구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대대로 재상(宰相)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나이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그는 그로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려 초기에 국기(國紀)를 확립(確立)했던
서 필(徐 弼)이다. 고려 광종(光宗)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이었던 필은
항상 솔직한 간언(諫言)으로 왕(王)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信任)을 받았다.
특히 그는 광종(光宗)의 지나친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歸化)한 중국인(中國人)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관리하던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孔子)가
마굿간에 있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諫)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산촌리 효양산에 있으며 음력 10월 1일에 향사 한다.
서씨 (徐氏)의 대종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효공왕때 아간대부를
지내다가 국운이 다함을 예견하고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의 효양산 기슭에 희성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스스로 처사라 칭하고 후진훈도에 여생을 바쳤으며,
그의 후손에서 달성, 장성, 연산, 남평, 부여, 평당, 대구 등으로 분
적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천 (利川)은 경기도 남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남천현(일명 남매현)인데, 신라 경덕왕이 황무현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태조때 이천군이라 하였다.
1257년 영창현이라 개칭하였고 공양왕때 남천군으로 승격하였다가 조선조에 와서 다시
이천현으로 격하되었으며, 그후 여러차례 변천을 거듭하다가 1896년에 경기도 이천군이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국만성보]와 [조선씨족통보]의 기록에
의하면 서신일은 신라창업의 원훈으로,
아성대장군을 지낸 서두라(徐豆羅)의 후손으로 천품이 인자중후하여 화살을 맞고 사냥군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 주었는데, 그날밤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서 감사의 말을 전하기를
"낮에 당신이구해준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 사냥군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된것을 다행히 당신의
은덕으로 살아나게 되었으니 당신의 자손대대로 재상이 되게 하리라"하고 사라졌다.
나이 80이 넘도록 자식이 없었던 서신일은 그로부터 부인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얻으니,
그가 바로 고려 초기에 국기를 확립했던 서필(徐 弼)이다.
고려 광종때 대광내의령 이었던 필은 항상 솔직한 간언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특히 그는 광종의 지나친 사치스러운 생활과 귀화한 중국인을 우대하는 폐단을 시정했고,
왕이 관리하던 신하를 죽이려 하자 공자가 마굿간에 있을 때 말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사람의 희생 여부를 물었다는 고사를 인용하여 왕에게 간하자 이를 용서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고려 성종때 뛰어난 외교관이자 정략가로 유명했던 희(熙)는 필(弼)의 아들로,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話術)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한민족의 생활권을 압록강의
자연적인 경계로 확정짓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여 국사상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희(熙)의 아들은 덕종때 삼중대광으로 내사령에 임명되고 자손에게 영업전이 하사된 눌(訥)과
우복야를 지낸 유걸(惟傑), 유위 (惟偉 : 장야서령), 주행(周行) 등으로 그중에서
유걸과 유위의 인맥이 두드러진다.
선종때 중서시랑평장사로 상주국이 되었던 정(靖)은 유걸의 아들이며, 그의 손자 순(諄)이
판비서성사에 올라 강직하기로 유명했으며, 유위의 현손 견(甄)은 절신으로 이름났다.
조선조에 와서는 밀직사 원(遠)의 아들 선(選)이 좌군도총제를 거쳐 우의정에 추증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판사재 감사 효손(孝孫)의 증손 강(崗)은 [세종실록]과 [문종실록]편찬에
참여했고 세조때는 예문관 직제학에 올라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나 세조의 숭불(崇 佛)을
논란하다가 파직되었다.
한편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던 기(起)는 화담 서경덕과 토정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우고 전국을 돌며 민속과 실용적 학문연구에 전심했으며,
특히 고향인 홍주의 풍속이 타락해짐으로
여씨향약(呂氏鄕約)으로 바로잡고자 마을에 강신당을 지어 풍속개량에 앞장섰으나
심한 저항으로 처자를 거느리고 지리산 홍운동으로 들어가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다가
후에 계룡산 고청봉으로 옮겨 가서 후진 교육에 진력했다.
임진왜란때 함흥과 홍원에서 대첩을 거두었던 경충 (敬忠)은 정유재란에도 전공을 세워
충무위 좌부장에 올랐으며, 득천(得 天)과 사원(思遠) 부자는 임진왜란때 왜병과 싸우다가 함께
전사하였다.
사원의 아우 사적(思迪)은 아버지와 형이 전사하자 700여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월성의 금장산,
선산의 금오산, 형산강 등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화왕산성 방어에 공을세워 3부자가 크게
명성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