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황제 헌원씨의 17세손 조명이 유누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지금의 평양 일토산 아래에 정착하였다. 그후 조명의
후손 수극이 기자가 왕이 되었을 때 왕씨 성을 하사 받았다. 그후 수극의
57세손 왕염의 13세손 왕몽으로 이어져 왔는데 왕몽은 신라 건국초기에 시중을
지냈다. 당시 비결에 '토초가위왕'이라 하였으므로 그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왕몽이 일곱째 아들 왕림(王琳)을 데리고 지리산에 들어가 10여년 동안 수도하면서
전, 신, 차씨 등으로 성을 바꾸었고 차무일이라고 이름을 바꾸었고 한다.
차무일의 셋째 아들 왕식시의 후손이 왕건이다.
개성 왕씨 (開城王氏)는 누대(累代)에
걸쳐 송악(松嶽) 지방(地方)에 세거(世居)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高麗)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된 국조(國祖)를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曾孫)으로 후삼국(後三國)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高麗王朝)의
문호(門戶)를 연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資質)이
비범하였다.
그는 스무살 때 태봉국왕(泰封國王)인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武功)을 세웠으며, 정벌(征伐)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다. 왕 건은 궁예(弓裔)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侍中)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보가 나날의 심해져 민심(民心)이
어지러워지자 918년(고려 태조 1) 신숭겸(申崇謙) · 홍 유 (洪 儒) · 복지겸 (卜智謙) · 배현경 (裵玄慶) 등 중신(重臣)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王位)에 올랐다. 그 후 34대왕조(王朝)에 걸쳐 4백 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었으나,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威化島) 희군으로 왕업(王業)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滅族)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 · 옥 (玉) · 금 (琴)
· 전 (田)씨 등으로 변성(變姓)하고 혈맥(血脈)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正祖) 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還姓)하고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본관은 개성(開城) · 강릉 (江陵) · 해주 (海州) 이외에 10여 본이 문헌에 전한다.
고려시대의 왕족으로 34왕 475년간 번영을 누린 씨족이다.
왕씨의 대종은 개성왕씨이며, 그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다.
왕건의 집안이 본디 송악(松岳:開城)지방의 호족이었다는 사실 이외는 그 선대에 대한 내력은 전해지지 않는다.
강릉왕씨의 시조는 태조의 아들 유(裕)이고, 해주왕씨의 시조 유(儒)는 본성이 박씨(朴氏)였는데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움으로써 태조가 왕씨
성을 사성한 것이다.
따라서 해주왕씨와 개성왕씨는 동성이족(同姓異族)이다.
당시에는 태조에게서 왕씨 성을 사성받은 사람이 많았다.
각 지방의 호족들을 무마 포섭하기 위하여 그들과 혼연(婚緣)을 맺거나 왕성을 사성(賜姓)하였다.
예컨대 강릉왕씨에는 유(裕)를 시조로 하는 일파 외에 차(叉)를 시조로 하는 또다른 일파가 있었는데 차는 강릉김씨의 시조 김주원(金周元)의
6대손인 선희(善希)의 아들로서 태조가 그의 딸을 왕비로 삼고 그에게 왕성을 사성하였다.
개성 (開城)은 경기도(京畿道)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려의 수도(首都)였으며 처음에는 송악군(松岳郡) · 송도
(松都) · 개경 (開京) · 부소갑 (扶蘇岬) · 동비홀 (冬比忽) ·
촉막군 (蜀莫郡) 등으로 불리웠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이 곳 송악산(松岳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성(開城)과 송악(松岳)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960년(광종 11) 황도(皇都)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고쳤다. 그 후 여러 변천을 거쳐 1906년
개성군이 되었고,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開城市)가 되었다.
개성 왕씨 (開城王氏)는 누대에 걸쳐
송악 지방에 세거해 온 호족(豪族)의 집안으로서,
고려때 원덕대왕에 추존된 국조를 시조로 하고 있다. 그의 증손으로 후삼국을 평정하고,
500년 고려왕조의 문호를 연 태조 왕건(王建)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비범하였다.
그는 스무살 때 태봉 국왕인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역전의 무공을 세웠으며, 왕건은 궁예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벼슬이 시중에 이르렀는데, 궁예의 횡포가 심해져 민심이 어지러워지자
918년 신숭겸, 홍유, 복지겸, 배현경 등중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후 34대왕조에 걸쳐 475년동안 왕씨(王氏)의 찬란한 문화는 꽃을 피었으나,
이성계의 위화도(威化島) 희군으로 왕업이 무너지면서 잔인한 정치적인 보복에 멸족의 참변을
당하여 전(全), 옥(玉), 금(琴), 전(田)씨 등으로 변성하고 혈맥을 유지하였으며, 조선
정조때 와서 왕씨(王氏)로 환성하고 송악의 옛 지명인 개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이렇게 뼈져린 수난의 역경의 딛고 일어선 왕씨(王氏)는 교서감을 지낸 [미]를 시작하로 하여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흥(興)은 선비(우왕의 비)의 아버지로 우왕초에
상의문하부사에 이르렀다. 단종때 의금부 도사를 지낸 방연(邦衍)은 폐위된 단종을 강원도
영월까지 호송하고 돌아왔으며, 인조때 부제학에 오른 희걸(希傑)은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그림에도 일가를 이루었고, 의성(義成)은 선조때 의병을 일으켜 청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그 밖에 한말의 독립운동가인 재일(在一)은 광주고보(光州高普)에 다니면서 비밀단체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광복운동에 앞장서기도 하였다
계파는 양양공파 , 안경공파, 시중공파,
평양공파가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개성왕씨(開城王氏)는 남한에 총 4,456가구,
18,7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이천군 율면 오성리
경기도 개풍군 일원
경기도 화성군 미산면 아미리
경남 의령군 의령면 상리
개성 개성왕씨부산파종친회 051-622-2903 부산
-남-용호1-395-9(23-3)
개성 개성왕씨부산파종친회 051-817-6337 부산 -부산진-부전1-347-26
개성(王)s 구래파 0513044849 부산사상구 모라 1동 656-7번지신아주택나동20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