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순태씨 (永順太氏)는 태씨(太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중상(太仲象)의 18세손으로 상장군을 지냈고, 병마원수로
영천군에 봉해진 태웅성(太雄成)의 아들 태금취(太金就:일명 금룡)을 1일세조로
하고 있다. 협계태씨족보에 의하면 금취는 고려 고종때 금교(金郊)에서 몽고군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올라 영순(상주)군에 봉해져, 상주군 북면
임하촌에 정착세거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협계태씨에서 분적하여 관향을 영순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시조 태금취가 영순 (경북 상주의 옛지명)군에
봉해져서 협계 태씨(浹溪太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영순(永順)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경상북도 (慶尙北道) 상주(尙州)의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상주(尙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
때 영순(永順)으로 고쳐 현(縣)으로 승격하고 상주(尙州)에 속하게 하였다.
지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문경군(聞慶郡) 영순면(永順面)이다.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효정 (孝貞)의
아들 두남(斗南)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김진양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1513년(중종8) 생원, 진사 양시(兩試)에 합격, 같은 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을 거쳐
사헌부 집의를 지냈으며, 1536년(중종31) 종부시정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으나 권신 김안로의 미움을 사서 성주 목사로 좌천되었다.
특히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나 저서로 쇄언(蔘言)을 남겼으며,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외 언룡(偃龍)과 순민(舜民)이 진사(進士)를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순태씨(永順太氏)는 남한에 총 902가구, 3,6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남 상주군 , 예천군 일원
태씨는 고대 주나라 태전의 후예라고 전하며
, 일설에는 발해국왕 대조영의 10세손 대광현이 발해가 망하자 수만명의 유민을
이끌고 서기 934년(고려 태조17) 고려로 망명하니, 태조가 그를 예우하고
태씨의 성을 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씨. 본관은 협계(浹溪)를 대종(大宗)으로 하고 그 밖에 영순(永順) · 밀양 (密陽) · 남원 (南原) · 통천 (通川) 등이 전해진다.
협계태씨는 주(周)나라 태전(太顚)의 후예라고도 하고, 기록상에는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예라고도 한다.
발해의 왕성(王姓)이라면 대씨(大氏)이므로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당하던 무렵 고려에 귀화하여 태씨로 변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화(投化), 태조로부터 왕계(王繼)로 이름을 하사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