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 (海州)는 황해도 남해안 중앙에 위치한 도청소재지로써 일찌기 고조선(古朝鮮) 이후 대방군에 속하여 고죽(孤竹)이라 불리웠고, 고구려(高句麗) 때는 내미홀(內米忽) 또는 지성(池城)·장지(長池)라 하였으며, 통일신라(統一新羅)시대에 폭지군(瀑池郡)으로 개칭하였다.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태조(太祖)가 본군의 남쪽이 대해(大海)에 임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海州)로 사명(賜名)하였으며, 성종(成宗) 때는 별호(別號)로 대령(大寧), 서해(西海)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해주 노씨(海州盧氏) 는 광산맥(光山伯) 해의 후손으로 광산 노씨(光山盧氏)의 일세조(一世祖)가 된 노 서(盧恕)의 후손 시헌(時憲)이 조선 태종(太宗) 때 해주(海州)로 이거(移居)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광산 노씨에서 분적(分籍)하고 시헌을 일세조로 하여 해주(海州)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을 빛내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헌(時憲)의 7세손 용수(龍壽)가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올랐고, 후손 열지(悅之)는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예조 정랑(禮曹正郞) 광협(光協)은 좌랑(佐郞) 수(修),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 事) 계종(繼宗), 부사(府使) 성지(性之)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