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 송씨 (延安宋氏)의 시조 송 경(宋 卿)은 고려 공민왕 때 나라에 공을 세워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겸 찬성사(贊成事)에 오르고 권신 홍언박(洪彦博)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의 미움을 받아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중신(重臣) 김 용(金 鏞)의 반란을 평정하고 앞서 홍건적을 격퇴시킨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으며 벽상에 도형(圖形)되었다.
이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서북면 체찰사(西北面體察使)를 지내고 추성익대보국동덕좌명 공신(推誠翼戴輔國同德佐命功臣)으로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경(卿)을 시조로 받들고 연안을 본관으로 삼아 대대로 그 곳에 살다가, 호남과 영남을 비롯한 평안도 지방으로 분산, 이주하게 되었다.
그 후 시조의 아들 훈(勛)이 고려 말에 여러 관직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라 명문의 기틀을 다졌으며, 손자 광언 (光彦)은 1367년(공민왕 16) 홍건적을 격퇴시키는 데 공을 세워 대사성(大司成)에 추증되고 연안군(延安君)에 추봉되어 가세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판서(判書) 훈(勛)의 둘째 아들 운룡(雲龍)이 고려 말기에 신호위 보승중랑장(神虎衛保勝中郞將)을 역임했고, 그의 아들 복륭(復隆)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오르고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와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여,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아들 근(根)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대사성(大司成) 광언(光彦)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흥도(興道)가 화령부 소윤(和寧府少尹)을 역임했고, 슬하에 아들 3형제가 현달했다.
조선의 거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보산(寶山: 소윤 흥도의 아들)은 『춘추』에 정통하여 별칭 <송춘추(宋春秋)>로 불리웠으며, 세종 때 높은 학문을 인정받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을 비롯한 많은 충신들이 화를 당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호남의 장수현(長水縣)으로 내려가<청심정(淸心亭)>을 짓고 한사로 자처하면서 학문연구로 여생을 마쳤다.
그의 아우 수산(壽山)은 세종 때 등과하여 봉상대부(奉常大夫)로 문하사인(門下舍人)에 이르렀고, 계유정난 후에 형 보산(寶山)과 함께 장수의 침령 벽계에 은거하며 후세
교육에 진력하니 당시의 사림에서는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추앙했고, 형과 더불어 <연안송씨양선생(延安宋氏兩先生)>으로 칭송을 받았으며, 박내 구빈은 양구 현감(楊口縣監)으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그 밖의 인물로는 장성 부사(長城府使)를 역임한 공선(公善: 판서 보산의 아들)과 호군(護軍)을 지내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승연(承衍), 예조 판서(禮曹判書)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유량(有良: 찬성사의 아들), 광주 목사(光州牧使) 지은(之殷: 부사 공선의 아들), 호조 좌랑(戶曹佐郞) 진(珍)과 그의 아들 인수(仁粹: 제주 목사와 도승지를 역임)·익수(益粹: 전라 우수사)·의수(義粹: 예조 참판) 3형제가 유명했으며, 임(맹현의 아들)은 일재(一齋) 이 항(李 恒)의 고제(高弟)로 영릉 참봉(英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여 학자로 명망이 높았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덕윤(德潤: 중추부사 계상의 아들)은 양근 군수(楊根郡守)와 장연 부사(長淵府使)를 거쳐 임진왜란 때 옹진 방어사(甕津防禦使)로 연안성(延安城) 방어에 공을 세우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어 크게 용맹을 떨쳤으며, 선전관(宣傳官) 간(簡)의 아들 덕영(德榮)은 맹산 현감(孟山縣監)으로 이 괄(李 适)의 난 때 절도사(節度使) 남이흥(南以興)의 막하로 들어가 정충신(鄭忠信)·이희달(李希達)과 더불어 길마재 싸움에서 훈공을 세워 진무삼등공신(振武三等功臣)으로 연창군(延昌君)에 봉해졌으며 정묘호란에는 안주의 남성 전투에서 전사하여, 판관(判官)을 역임한 호(浩), 현감(縣監) 인보(仁寶), 군수(郡守) 덕준(德俊) 등과 함께 연안 송씨를 대표했다. |